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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세 가지 표지 시안을 보내달라고 했다. 밑도 끝도 없는 폭력적 요구다. '일단 시안을 보내주면 이쪽에서 검토한 후 통보하겠다.' 시작부터 소통을 닫아버린다.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가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이런 멍청한 관행은 사라져야 한다. 처음부터 디자인 방향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스케치를 보여주며 진행하지 않고서는 양쪽 다 만족할 만한 결과가 나오기 어렵다. 설령 좋은 결과가 나온다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의 낭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덩치 큰 회사는 '납품'과 '승인/거부'의 시스템을 고집한다.

나는 군말없이 세 가지 '시안'을 만들어서 보냈다. (클릭하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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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것이 가장 맘에 드는 레이아웃이고, 두 번째는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그냥 숫자를 채우려고 만든 것이다.

첫 번째 디자인은 오랜 시간 머릿속에 이미지를 그려서 만든 결과물로, 내지 디자인을 매우 잘 반영한다. 비유를 하자면, 과일의 속과 껍질과 같은 관계라 하겠다. 서로 다르지만 연결되어 있다. '이런 내지라면 표지는 어떤 모양이어야 할까'를 상상해서 만든 것이다. 두 번째 빨간 표지도 같은 생각에서 나온 레이아웃이지만 내지와의 관계가 첫 번째의 그것에 비해 약하다.

내지는 아래와 같은 페이지 레이아웃을 담고 있다. (클릭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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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정도가 지난 후, 출판사에 상주하는 아트디렉터께서 첫 번째 시안으로 하자고 결정하셨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쉽게?'라고 의심했지만, 뭐... 내가 만든 것을 인정해 준다니 일단 기분이 좋았다. 이제 내지 교정보고 인쇄소에 넘기면 끝일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표지 디자인이 결정된 후, 나는 약 두 달간 미칠듯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와중에 Volume 책 디자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젠장. 또 하나의 복병이 등장했다. 그 복병은 바로 'sales representative', 즉, 마케팅 담당자였다. 젠장. 젠장. 젠장. 왜 이제 와서 나타난거야. 이 일 하지 말걸 그랬어. 괜히 한다 그랬어. 괜히 한다 그랬어. 괜히 한다 그랬어.

덩치 큰 회사를 상대로 하는 디자인은 이래서 피곤하다. 

편집자가 전하길, 
"마케팅 담당자는 이 책이 그래픽 디자이너를 넘어선 대중에게 판매가 가능하다고 보고, 이를 위해서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디자인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의 표지는 너무 조용하고 우아하다네요. 좀 더 눈길을 끌 수 있는 표지로 다시 만들어야겠습니다. 아트디렉터는 첨부한 이미지와 같은 책표지를 좋은 예로 추천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volume'이라는 제목과 연관된 디자인이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편집자야, 너가 중간에서 말 전하느라 고생이 많다.

아래는 아트디렉터가 '좋은 예'로 지목했다는 두 표지 디자인이다.
참고로 두 번째 노란 책표지는 에봇 밀러가 마이클 베이루트를 위해 친히 디자인하신 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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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들을 본보기로 삼으라고... 그래... 너희들 수준이 딱 이정도구나.

문제는 디자이너와 마케팅 담당자가 디자인을 보는 관점이 판이하게 다르다는데 있다. 앞서 말했다시피, 나는 책을 하나의 독립된 사물로 보고 그 내용물의 껍질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표지를 디자인 했다. 하지만 마케팅 담당자는 이 책이 어떤 모습으로 독자 곁에 남을지와 같은 사소한 일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얼마나 많이 팔릴 것인가'

좋다. 이런 좋은 책은 많이 팔릴 수록 좋다.

그런데 책을 많이 팔리게 하는 방법이 고작 '보다 넓은 독자층'을 겨냥해 '눈길을 끌만한' 이미지로 장난친 표지를 만드는 방법밖에 없는 걸까? 아마 마케팅 담당자는 이런 식으로 대답할 것이다. "지금까지 서점 매출 통계로 볼 때, 이런 종류의 책은 이런 느낌의 표지가 많이 팔렸습니다."

이런 '마케팅적 발상'에는 치명적 문제가 있다. 이들의 논리를 따른다면 모든 책은 다른 베스트셀러와 비슷하게 만들어야 잘 팔릴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구매자의 눈에 띄려면 확실히 다르게 생겨야 한다는 사실은 삼척동자도 안다. 마케팅 담당자도 저능아가 아닌 이상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말장난을 꾸민다. "서점에 있는 베스트셀러와 비슷하게, 하지만 뭔가 특별하게 만들어 주세요." 이런 모순된 논리를 전제로 해서는 제 아무리 발버둥 쳐봤자 괜찮은게 나올리 만무하다. 결국 그냥 이도저도 아닌, 우유에 물 탄 것 같은 어떤 물건이 또 하나 탄생할 뿐이다.

나는 마케팅이라는 분야를 혐오한다. 어쩌면 세상에는 괜찮은 마케터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경험한 그들은 온갖 과거의 수치를 들이대며 창의력을 가로막는 사람들 뿐이었다.

마케팅이 책 디자인의 영역으로 들어왔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되는 점은 그들이 책 표지를 '광고 수단'으로 인식한다는 사실이다. 표지가 내용을 함축해 알린다는 점에서 광고의 성격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을 전적으로 상업적 광고의 공간으로 삼는다면 구매자가 오랫동안 소유하게 될 물체로서의 가치는 무시되고, 결국 여성잡지 표지보다 하나도 나을게 없는 어떤 괴물이 만들어지게 된다. 

디자이너는 자연과 문화, 관습, 기능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인공물의 독립된 형태를 만든다. 그런데 이렇게 완결된 형태에 뜬금없이 어떤 '광고'적 이미지가 덧입혀진 사물은 혼란스럽고 천박하기 그지없다. (아이 패드의 뒷면에 스티브 잡스의 사진이 새겨져 있다고 상상해보라) 이런 디자인은 짧은 순간 눈길을 끌 수 있을지는 몰라도, 매장을 벗어나면 금새 질리고 일상 공간에 섞이지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요즘 우리가 서점에서 볼 수 있는 책들은 90퍼센트 이상이 이런 표지로 칠해져 있다.

물론, 마케팅 담당자에게 이런 말은 동네 언니 껌 씹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 머릿 속에는 뭐든 많이 팔아먹을 생각만 가득할테니.

나는 표지 디자인에 대한 내 생각을 간략하게 써서 담당 편집자에게 보냈다. 그 마케팅 담당자라는 사람에게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다음 날 "당신 생각은 이해하지만..."으로 시작하는 답장을 받았다. 회사 입장에서는 판매량을 중요시하지 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충분히 예상했다. 이 출판사는 돈을 벌기 위해 책을 발행하므로(물론 본인들은 부인하겠지만) 판매 촉진에 반하는 관점은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한푼이라도 더 벌게 해준다는 사탕발림을 일삼는 마케팅 부서의 결정에 휘둘릴 수 밖에 없다.

담당 편집자가 무려 이틀 후에 다른 시안을 볼 수 있겠냐고 묻기에, 속으로 '미친거 아냐?'라고 생각하고, 겉으로 "그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열흘의 시간이 주어졌다. 덧붙여, 새로운 표지 디자인은 4도 잉크를 쓰는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일주일 동안 어떤 '광고적 표지'를 만들지 고민했다. 아트디렉터 님께서 보내주신 두 예시에서는 어떠한 가치있는 방향성이나 수준을 찾을 수 없었다. 왜 그런 거지같은 표지 디자인을 보여준 건지 이유가 궁금할 정도였다. 그래서 가볍게 무시.

일주일 동안 떠올린 세 가지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열심히 찍고 그려서 뚝딱 만들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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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Type Addicted'라는 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작가의 사무실에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글자로 조합한 것이다. 두 번째는 조나단 반브룩 작품집을 보다가 문득 이미지가 떠올라 내지에 들어가는 장식을 적극 활용해서 만들었다. 세 번째는 글자를 서로 다른 질감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샤프펜으로 선을 그려 완성했다.

첫 번째 시안이 채택되리란 느낌이 들었다. 이런 귀여운 이미지가 무난하게 넘어가기 마련이므로.

예상은 적중했다. 출판사 관계자들 대부분이 첫 번째를 좋아했다. 아트디렉터 님은 나한테 두번 일 시킨게 미안했던지 '좋은 디자인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이메일을 날렸다. 뒷표지와 책등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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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몇가지 오탈자 정정과 함께 책의 가격을 넣어달라는 요청이 왔다. 안그래도 근질근질했는데 잘됐다. '광고적' 표지를 만드는 김에 아예 가격을 왕창 강조해서 표시해주마. 세일 행사에 나붙는 스티커처럼 만들었다. 물론, 편집자와 아트디렉터가 싫어할 거란 사실은 불보듯 뻔했다. 이 정도를 수용할 만한 유머감각이 없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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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을 평범하게 넣고, 'Volume'의 'e'자에 길게 늘여진 꼬리를 없에 달라는 요구가 돌아왔다. 나는 스티커 모양은 뺄 수 있지만 'e'자의 꼬리는 그대로 살리자고 정중히 부탁했다. 그 글자 모양은 내지 소제목에 사용한 글꼴의 특징을 잘 나타내기 때문에 꼭 지금처럼 넣고 싶다고 설명했다. 아트디렉터 님은 내 노력에 감복하셨는지 하해지은을 배푸시어 '꼬리달린 e'를 살려주셨다.

며칠 뒤 표지와 내지가 모두 인쇄소로 넘어갔다. 처음 선택했던 표지가 훨씬 더 좋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 없다.

설득과 조율은 양측이 왠만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능하다. 수익은 선(善)이요, 판매를 늘려주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굳게 믿는 마케팅 담당자의 '원칙'에는 어떠한 협상의 여지도 없다. 원래 마케팅이란 것은 디자인과 제조가 끝난 이후 판매 단계에 관여해야 할 활동이다. 과거의 기록과 통계에 집착하는 마케팅의 논리가 창조적 활동인 디자인에 대해 결정권을 휘두르는 웃지 못할 상황은 심각하게 왜곡된 자본주의 산업 구조의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시스템 안에서 '많이 팔리는' 디자인이 아닌 '좋은' 디자인, '창의적인' 디자인을 추구하는게 과연 가능할까? '잘 팔리는 디자인을 만들라'는 요구는 주객전도다. 마케팅 부서는 디자인에 참견할 생각 말고 얌전히 기다려라. 제품이 완성됐을 때 우리가 말할 것이다. '이 디자인을 잘 팔리게 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