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tal Articles 337
정글 콜론
디자인정글 편집부, 디자인 정글 (2010년 6월)
글: 이지원
'시크'하고 '쿨'한 사람이 인기를 끈다는 말이 나돕니다만, 애석하게도 저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인지라 유행에 맞춰 호감 있게 말하기는 애당초 글러먹은 것 같습니다. '무심한듯 시크하다'는 말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죠. 유행어는 시류를 반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충 모른척 할 줄 알아야 멋쟁이로 쳐줍니다. 반면 깊이 파고들며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촌스럽다고 여기곤 하죠.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다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제 눈을 반긴 것은 '대전시 교육감 선거 포스터'였습니다. 고층 건물 벽면을 반정도 뒤덮은 울트라 메가 사이즈 포스터들은 압도적인 그래픽이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의 시각 문화로부터 잠시 자유로웠던 저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신선한 관찰거리였죠. 하지만 직업적 공상은 이내 물러가고 '대전시 교육감으로 적당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실질적인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그건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람들은 교육감 후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왜 어마어마한 포스터들이 나붙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 특히 학부모들에게 대전시 교육감 선거는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는 행사입니다. 교육 관계자에게 이름 한번 들어봤거나, 조금이라도 낯익은 사람을 찍는거죠. 후보들의 경력과 공약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 취급 받습니다. 경력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고 공약은 휴지조각일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더구나 아무도 교육감이 바뀌어서 어떤 개선이 이뤄지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건 시니컬한 농담 뿐입니다.
이런 얘기가 디자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범위를 좁혀서 말해 보죠. 요즘 한국 디자이너는 시크할대로 시크합니다. 자신이 매일같이 하는 일에 적당히 무심한 채로 오직 생계만을 위해 일하며 주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만 살핍니다. 디자인 사회가 우러러보는 롤모델은 어떤 모습입니까. 외국에서 유학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작지만 진보적인 갤러리에서 알쏭달쏭한 전시회를 해야 한국 그래픽 디자인 사회에서 잘 나가는 축에 낍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비난하는게 아닙니다. 문제는 유학-교수-전시회로 이어지는 경력을 이상적인 커리어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디자이너와 학생의 주요 관심이 언제나 디자인 외적인 사항에만 쏠린다는데 있습니다.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디자인 잘 한다니까 자신도 유학을 가야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교수님들의 전시회를 보며 왠지 이상적인 디자인은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닌지 하며 뜬구름 잡습니다. 그러다 보면 디자인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전시회하고 유명해졌는데 나는 왜 여기서 전단지나 만들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명하고 인기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바램, 그리고 그 바램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며 있지도 않은 한계를 느끼고 다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디자인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책 열심히 읽어봐야 나랑 아무 상관없는 딴나라 얘기죠. 없는 시간 쪼개서 강연회나 워크샵에 나가보면 재미는 있지만 실무에선 먹히지 않는 실험적인 논의 뿐입니다. 디자인 블로그에는 온통 현학적인 내용만 올라오죠. 동인지는 고상하고 배부른 소리를 내뱉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다른 사람들 몫이고, 남겨진 건 수당없는 밤샘 작업 뿐입니다. 디자인을 열정적으로 대할 만한 동기가 없어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들 중 단지 99 퍼센트만이 그럴 뿐입니다.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고 생각될 때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점검해야 합니다. 시크하고 쿨해진 마음을 열정으로 덥히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세요. '나는 왜 디자인을 하는가?' 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멋진 대답을 지어내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마음 속으로 솔직하게 대답해 보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양한 답이 있겠습니다만, 사실 크게 봤을 때 우리의 대답은 단 하나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클라이언트의 소득증대를 위해'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했다면 번지수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다른 일을 찾으세요. 디자인 계속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디자인을 목적으로 여긴다면, 즉, '좋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면 일단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셈입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신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겁니다. '무엇이 좋은 디자인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당신에게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아니, 각자가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네요.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요? 누가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가치가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쪽의 가치관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눈에 띄죠. 디자인도 마찬가집니다. 100년, 50년 전에 미국과 유럽을 주름잡던 디자이너들의 사상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들은 좋아 죽는 스테판 세그마이스터의 작품이 나에게는 쓰레기일 수도 있고, 모두가 열광하는 네덜란드 디자인에 시큰둥 할 수도 있어요. 트랜드는 남들이 하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게 나의 길일 수는 없습니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디자인은 무조건 좋은 디자인이고 그것을 따르면 내 디자인도 좋아질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대세'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대세를 따르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내심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동조해야만 할 것 같아요. 주관이 없는 겁니다.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말에 쉽게 휩쓸립니다. 감히 단언컨데, 디자이너는 트랜드에 민감해야 하고 유행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말은 몽땅 헛소립니다. 그런 사기꾼의 말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나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행은 독약입니다. 정처없이 떠도는 배는 태풍이 오면 여기저기 휩쓸리다가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왠만한 파도에 쓸려가지 않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 씨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성인이 되었으면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 뭔가를 환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선단체에 성금을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환원은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 하고, 군인은 나라를 잘 지키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제대로 한다면 이 사회는 잘 돌아가겠죠. 배운 사람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선행도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까? 아니,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나 있습니까? 무엇이 좋은 디자인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이고, 나침반 없는 사막의 여행자입니다.
요즘에는 많은 디자이너가 기업에 연관된 활동을 위주로 살아갑니다. 쉽게 말해 기업의 지갑을 배불려주는 일을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기업도 디자인을 수익 증대 수단, 딱 그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기업이 그토록 애절하게 외치는 고객만족, 사용자의 편의 따위는 모두 제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한 수단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현실입니다. 디자이너가 기업의 상업적 가치를 '전지전능하신 클라이언트 님의 고귀하신 뜻'으로 모시는 상황에서 디자인은 돈을 벌어다주는 도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업가가 디자인을 효율적인 선전 수단으로 인식된 때는 1900년대 중반 미국의 기업들이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당시 현대주의 예술을 비즈니스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미국의 사업가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는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예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보고 '소비의 공학', '의도적 노후화', '스타일로 치장한 제품'과 같은 마케팅 수단을 주창했습니다.
광고에 사용되는 이미지와 디자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이미지와 디자인은 내부를 보여주는 단면도여서는 곤란하다. 광고는 커피에 얹은 거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술을 약게 활용한다면 추하고 멍청하고 진부한 내부를 능히 감출 수 있다.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 미국의 광고예술, <Looking Closer 3>, <Studio Yearbook>에 최초 기재 (The Studio, 1936년, 런던)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의 방법론은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75년전 미국의 사업가가 했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디자이너는 예술과 디자인을 본질로부터 분리한 채 단지 새로운 스타일로 치장하는데 사용해서 사람들이 불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게끔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저는 요즘 온갖 미디어에서 외쳐대는 '트랜드'란 말을 들을 때마다 역겨움을 느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랜드, 유행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을 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트랜드란 것은 기업이 어떻게든지 물건과 서비스를 팔아먹기 위해 대규모 자본과 물량 공세를 펼쳐 조작해 낸 흐름입니다. 이렇게 날조된 이미지를 마치 우상인 양 받들고 이를 따라잡네 앞서가네 하며 애쓰는 모습은 웃기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기업의 활동에는 장사의 원칙만 있을 뿐 디자인의 철학은 없습니다. 기업에 고용된 디자이너는 유행을 순환시키는데 필요한 이미지를 찍어 내면서 그것이 사실은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죠. 도대체 우리가 만드는 말끔한 제품 로고와 현란한 티비 광고, 포장지, 웹사이트의 어떤 부분이 사용자를 위한 것입니까. 아, 그렇군요. 웹사이트의 결제 메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들어서 소비자의 지갑을 재빨리 열게 할 수는 있겠네요.
디자인은 자본이 주도하는 문화 산업의 일방적인 놀음에 좌지우지되며 현실을 왜곡하는 한낱 거짓된 활동으로 타락했다. [. . .] 우리는 눈먼 자유 속에서 그저 돈을 버는 일에 만족하며 반성과 비평의 신경을 절단한 채 자신을 스스로 속물화 시켰다.
얀 반 툰, 디자인 그리고 깨어 있는 의식, 그래픽 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 (비즈앤비즈, 2009)
자본주의의 논리에 찌들은 기업 활동에 염증을 느낀 디자이너에게 '공공디자인'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하지만 사실 '공공 디자인'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디자인은 그 활용과 기능에 있어서 이미 공공의 성격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공공 디자인은 사실 '관공서에서 실시하는 디자인'이라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그래픽 디자인은 매체의 표현에 관여하며 사회의 모습을 이룹니다. 가로수와 표지판이 도로의 경관을 형성하듯이 잡지와 책은 독자의 마음에 비치는 경치를 이룹니다. 공원의 벤치와 나무 그늘에서 행인이 휴식을 취하듯이 잘 만들어진 휴대폰 화면과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은 각박한 생활의 즐거움이 됩니다. 디자이너는 생활 속의 수많은 작은 일을 통해 공익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대규모 환경 미화 사업이 공공 디자인으로 분류되는 상황은 디자이너가 일상 속에서 대중 매체를 디자인 함에 있어 공익의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하는게 아닐까요.
우리는 한동안 너도나도 정부에서 이슈화시키는 공공디자인을 입에 담으며 내심 그것이 나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줄 돌파구가 될 수 있을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까요? 오랜 세월동안 자생적으로 형성된 거리, 시장, 운동장을 몽땅 갈아엎고 그 위에 기하학적 모양의 벤치를 세우고, '디자인 센터'란 걸 세우고, 재개발에 재개발을 거듭하는데서 어떤 '공익'이 발생한다는 겁니까. 요즘 정부에서는 '한국적'이란 말을 신앙처럼 받들고 전파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몇 십년간 간신히 자리잡은 한국적인 모습을 몽땅 밀어버리고 거기에 외국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세련된' 것으로 채워넣으려는 망상이 전부입니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디자인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걸 거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거인의 시선은 달리 말해 '투시도의 시선', '조감도의 시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미래주의 건축가들은 투시도를 통해 가상의 유토피아를 그렸습니다. 그 유토피아에는 끝없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거대한 굴뚝이 있고, 반듯반듯한 차도와 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샌트 엘리아라는 건축가의 이름을 검색해 보시거나 수도권 신도시의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을 찾아가 보세요. 그 설계도들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사람이 없어요. 굳이 상상하자면 거대한 투시도 속에서 사람은 눈썹털보다 작은 크기일 겁니다. 지금 광화문 광장에 대해 말이 많죠.광화문 광장이나 서울시청 광장 같은 구조물은 헬리콥터를 타고 봤을때 보기 좋은 공간일 뿐 그 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공간은 아닙니다. 둘째는 계획대로 되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도시는 하얗게 칠하고 조명을 설치한 다음 '손대지 마시오' 표지판을 걸어놓는 갤러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닳고, 부서지고 때가 타고, 전단지가 나붙고, 가판대가 설치되고, 때타고, 얼룩지고, 웃고 떠드는 장소입니다. 자생적인 변화가 아닌 어떤 거대한 기획에 따라 일률적으로 계획된 공간은 인간의 유기적인 삶을 담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때가 타고 허물어지고 덧붙여질 수 밖에 없어요. 그 어떤 계획도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디자이너는 본질과 동떨어진 일에 얽메인 채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거짓말쟁이 기업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정부의 지시를 받으며 좌절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은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지 못한 채 외부의 지시에만 의존해 작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좋은 디자인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관 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디자이너가 따라야 할 절대적인 사상이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들겠지만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합니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시크하고 쿨한 마음가짐을 버리고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을 기업과 정부의 일을 거절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셨다면 당신은 요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신 겁니다.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디자이너는 각박하고 혼란스러운 디자인 산업의 현실을 맞아 안전한 갤러리에서의 작품활동으로 도망치는 대신, 사회 속의 실질적인 일에 더 많이 부딫히며 끊임없이 본인의 디자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중에는 기업의 광고도 있고 정부의 환경미화 사업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 내가 좋다고 믿는 방식을 실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뚜렷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협력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져야 합니다. 데이비드 헵워스라는 편집인은 영국의 가디언지에 '디자이너에게 맡기기엔 디자인이 너무 중요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평범한 문제를 교묘한 속임수를 부려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은 디자이너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그저 책임을 면하기 위한 아첨과 속임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농담삼아 클라이언트가 얼마나 디자인에 무지한지에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우리는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를 끌고 함께 갈만한 소양이 있는지에 대해 돌아보는 때는 진정 드뭅니다. 디자이너가 확실한 소신을 갖고 클라이언트에게 협조를 구할때 의외로 많은 경우 클라이언트가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관철하고 싶은 소신이 있을 때의 얘깁니다만.
진심으로 몰입할 줄 아는 디자이너는 디자인 외의 모든 문제에 초연합니다. 하고 싶은 디자인이 확실한 디자이너는 지위나 연봉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의 평가와 수상 실적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디자인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런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심각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바가 확실하다고 해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거지같은 상황이 디자이너를 덮쳐 모든걸 망쳐버리는 경우가 숱하게 많습니다. 일이 원하는대로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바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가다듬으며 일상의 디자인을 수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믿는 바를 실현할 기회가 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생각하는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런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느끼기 시작할때 그런 기회는 찾아옵니다. 당신이 기업에 있건, 관공서에 있건, 학교에 있건, 미국에 있건, 네덜란드에 있건 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
국민대학교 제로원 센터 강의에서 최초 발표 (2010. 5. 17.), 홍익대학교 대학원 수업에서 발표 (2010. 5. 19.), 한밭대학교 특강 (2010. 6. 16), <정글 콜론>에 최초 기재 (2010. 6. 10.)
'시크'하고 '쿨'한 사람이 인기를 끈다는 말이 나돕니다만, 애석하게도 저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인지라 유행에 맞춰 호감 있게 말하기는 애당초 글러먹은 것 같습니다. '무심한듯 시크하다'는 말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죠. 유행어는 시류를 반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충 모른척 할 줄 알아야 멋쟁이로 쳐줍니다. 반면 깊이 파고들며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촌스럽다고 여기곤 하죠. 한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다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제 눈을 반긴 것은 '대전시 교육감 선거 포스터'였습니다. 고층 건물 벽면을 반정도 뒤덮은 울트라 메가 사이즈 포스터들은 압도적인 그래픽이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의 시각 문화로부터 잠시 자유로웠던 저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신선한 관찰거리였죠. 하지만 직업적 공상은 이내 물러가고 '대전시 교육감으로 적당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실질적인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그건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람들은 교육감 후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왜 어마어마한 포스터들이 나붙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 특히 학부모들에게 대전시 교육감 선거는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는 행사입니다. 교육 관계자에게 이름 한번 들어봤거나, 조금이라도 낯익은 사람을 찍는거죠. 후보들의 경력과 공약을 열심히 들여다 보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 취급 받습니다. 경력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고 공약은 휴지조각일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더구나 아무도 교육감이 바뀌어서 어떤 개선이 이뤄지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건 시니컬한 농담 뿐입니다.
이런 얘기가 디자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범위를 좁혀서 말해 보죠. 요즘 한국 디자이너는 시크할대로 시크합니다. 자신이 매일같이 하는 일에 적당히 무심한 채로 오직 생계만을 위해 일하며 주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만 살핍니다. 디자인 사회가 우러러보는 롤모델은 어떤 모습입니까. 외국에서 유학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작지만 진보적인 갤러리에서 알쏭달쏭한 전시회를 해야 한국 그래픽 디자인 사회에서 잘 나가는 축에 낍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비난하는게 아닙니다. 문제는 유학-교수-전시회로 이어지는 경력을 이상적인 커리어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디자이너와 학생의 주요 관심이 언제나 디자인 외적인 사항에만 쏠린다는데 있습니다.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디자인 잘 한다니까 자신도 유학을 가야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교수님들의 전시회를 보며 왠지 이상적인 디자인은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닌지 하며 뜬구름 잡습니다. 그러다 보면 디자인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전시회하고 유명해졌는데 나는 왜 여기서 전단지나 만들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명하고 인기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바램, 그리고 그 바램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며 있지도 않은 한계를 느끼고 다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디자인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책 열심히 읽어봐야 나랑 아무 상관없는 딴나라 얘기죠. 없는 시간 쪼개서 강연회나 워크샵에 나가보면 재미는 있지만 실무에선 먹히지 않는 실험적인 논의 뿐입니다. 디자인 블로그에는 온통 현학적인 내용만 올라오죠. 동인지는 고상하고 배부른 소리를 내뱉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다른 사람들 몫이고, 남겨진 건 수당없는 밤샘 작업 뿐입니다. 디자인을 열정적으로 대할 만한 동기가 없어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들 중 단지 99 퍼센트만이 그럴 뿐입니다.
막다른 길에 부딪혔다고 생각될 때는 가장 기본적인 사항을 점검해야 합니다. 시크하고 쿨해진 마음을 열정으로 덥히기 위해 질문을 던져보세요. '나는 왜 디자인을 하는가?' 남들에게 잘보이기 위해 멋진 대답을 지어내지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마음 속으로 솔직하게 대답해 보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양한 답이 있겠습니다만, 사실 크게 봤을 때 우리의 대답은 단 하나 밖에 있을 수 없습니다.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클라이언트의 소득증대를 위해'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했다면 번지수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다른 일을 찾으세요. 디자인 계속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디자인을 목적으로 여긴다면, 즉, '좋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면 일단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셈입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신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겁니다. '무엇이 좋은 디자인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당신에게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아니, 각자가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네요.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요? 누가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가치가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쪽의 가치관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눈에 띄죠. 디자인도 마찬가집니다. 100년, 50년 전에 미국과 유럽을 주름잡던 디자이너들의 사상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들은 좋아 죽는 스테판 세그마이스터의 작품이 나에게는 쓰레기일 수도 있고, 모두가 열광하는 네덜란드 디자인에 시큰둥 할 수도 있어요. 트랜드는 남들이 하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게 나의 길일 수는 없습니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디자인은 무조건 좋은 디자인이고 그것을 따르면 내 디자인도 좋아질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대세'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대세를 따르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내심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동조해야만 할 것 같아요. 주관이 없는 겁니다.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말에 쉽게 휩쓸립니다. 감히 단언컨데, 디자이너는 트랜드에 민감해야 하고 유행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말은 몽땅 헛소립니다. 그런 사기꾼의 말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나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행은 독약입니다. 정처없이 떠도는 배는 태풍이 오면 여기저기 휩쓸리다가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왠만한 파도에 쓸려가지 않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 씨가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성인이 되었으면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 뭔가를 환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선단체에 성금을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환원은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 하고, 군인은 나라를 잘 지키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제대로 한다면 이 사회는 잘 돌아가겠죠. 배운 사람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선행도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까? 아니,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나 있습니까? 무엇이 좋은 디자인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이고, 나침반 없는 사막의 여행자입니다.
요즘에는 많은 디자이너가 기업에 연관된 활동을 위주로 살아갑니다. 쉽게 말해 기업의 지갑을 배불려주는 일을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기업도 디자인을 수익 증대 수단, 딱 그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기업이 그토록 애절하게 외치는 고객만족, 사용자의 편의 따위는 모두 제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한 수단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현실입니다. 디자이너가 기업의 상업적 가치를 '전지전능하신 클라이언트 님의 고귀하신 뜻'으로 모시는 상황에서 디자인은 돈을 벌어다주는 도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업가가 디자인을 효율적인 선전 수단으로 인식된 때는 1900년대 중반 미국의 기업들이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당시 현대주의 예술을 비즈니스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미국의 사업가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는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예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보고 '소비의 공학', '의도적 노후화', '스타일로 치장한 제품'과 같은 마케팅 수단을 주창했습니다.
광고에 사용되는 이미지와 디자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이미지와 디자인은 내부를 보여주는 단면도여서는 곤란하다. 광고는 커피에 얹은 거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술을 약게 활용한다면 추하고 멍청하고 진부한 내부를 능히 감출 수 있다.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 미국의 광고예술, <Looking Closer 3>, <Studio Yearbook>에 최초 기재 (The Studio, 1936년, 런던)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의 방법론은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75년전 미국의 사업가가 했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디자이너는 예술과 디자인을 본질로부터 분리한 채 단지 새로운 스타일로 치장하는데 사용해서 사람들이 불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게끔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저는 요즘 온갖 미디어에서 외쳐대는 '트랜드'란 말을 들을 때마다 역겨움을 느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랜드, 유행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을 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트랜드란 것은 기업이 어떻게든지 물건과 서비스를 팔아먹기 위해 대규모 자본과 물량 공세를 펼쳐 조작해 낸 흐름입니다. 이렇게 날조된 이미지를 마치 우상인 양 받들고 이를 따라잡네 앞서가네 하며 애쓰는 모습은 웃기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기업의 활동에는 장사의 원칙만 있을 뿐 디자인의 철학은 없습니다. 기업에 고용된 디자이너는 유행을 순환시키는데 필요한 이미지를 찍어 내면서 그것이 사실은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죠. 도대체 우리가 만드는 말끔한 제품 로고와 현란한 티비 광고, 포장지, 웹사이트의 어떤 부분이 사용자를 위한 것입니까. 아, 그렇군요. 웹사이트의 결제 메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들어서 소비자의 지갑을 재빨리 열게 할 수는 있겠네요.
디자인은 자본이 주도하는 문화 산업의 일방적인 놀음에 좌지우지되며 현실을 왜곡하는 한낱 거짓된 활동으로 타락했다. [. . .] 우리는 눈먼 자유 속에서 그저 돈을 버는 일에 만족하며 반성과 비평의 신경을 절단한 채 자신을 스스로 속물화 시켰다.
얀 반 툰, 디자인 그리고 깨어 있는 의식, 그래픽 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 (비즈앤비즈, 2009)
자본주의의 논리에 찌들은 기업 활동에 염증을 느낀 디자이너에게 '공공디자인'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하지만 사실 '공공 디자인'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디자인은 그 활용과 기능에 있어서 이미 공공의 성격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공공 디자인은 사실 '관공서에서 실시하는 디자인'이라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그래픽 디자인은 매체의 표현에 관여하며 사회의 모습을 이룹니다. 가로수와 표지판이 도로의 경관을 형성하듯이 잡지와 책은 독자의 마음에 비치는 경치를 이룹니다. 공원의 벤치와 나무 그늘에서 행인이 휴식을 취하듯이 잘 만들어진 휴대폰 화면과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은 각박한 생활의 즐거움이 됩니다. 디자이너는 생활 속의 수많은 작은 일을 통해 공익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대규모 환경 미화 사업이 공공 디자인으로 분류되는 상황은 디자이너가 일상 속에서 대중 매체를 디자인 함에 있어 공익의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하는게 아닐까요.
우리는 한동안 너도나도 정부에서 이슈화시키는 공공디자인을 입에 담으며 내심 그것이 나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줄 돌파구가 될 수 있을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까요? 오랜 세월동안 자생적으로 형성된 거리, 시장, 운동장을 몽땅 갈아엎고 그 위에 기하학적 모양의 벤치를 세우고, '디자인 센터'란 걸 세우고, 재개발에 재개발을 거듭하는데서 어떤 '공익'이 발생한다는 겁니까. 요즘 정부에서는 '한국적'이란 말을 신앙처럼 받들고 전파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몇 십년간 간신히 자리잡은 한국적인 모습을 몽땅 밀어버리고 거기에 외국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세련된' 것으로 채워넣으려는 망상이 전부입니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디자인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걸 거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거인의 시선은 달리 말해 '투시도의 시선', '조감도의 시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미래주의 건축가들은 투시도를 통해 가상의 유토피아를 그렸습니다. 그 유토피아에는 끝없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거대한 굴뚝이 있고, 반듯반듯한 차도와 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샌트 엘리아라는 건축가의 이름을 검색해 보시거나 수도권 신도시의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을 찾아가 보세요. 그 설계도들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사람이 없어요. 굳이 상상하자면 거대한 투시도 속에서 사람은 눈썹털보다 작은 크기일 겁니다. 지금 광화문 광장에 대해 말이 많죠.광화문 광장이나 서울시청 광장 같은 구조물은 헬리콥터를 타고 봤을때 보기 좋은 공간일 뿐 그 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공간은 아닙니다. 둘째는 계획대로 되는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도시는 하얗게 칠하고 조명을 설치한 다음 '손대지 마시오' 표지판을 걸어놓는 갤러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닳고, 부서지고 때가 타고, 전단지가 나붙고, 가판대가 설치되고, 때타고, 얼룩지고, 웃고 떠드는 장소입니다. 자생적인 변화가 아닌 어떤 거대한 기획에 따라 일률적으로 계획된 공간은 인간의 유기적인 삶을 담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때가 타고 허물어지고 덧붙여질 수 밖에 없어요. 그 어떤 계획도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디자이너는 본질과 동떨어진 일에 얽메인 채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거짓말쟁이 기업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정부의 지시를 받으며 좌절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은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지 못한 채 외부의 지시에만 의존해 작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좋은 디자인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관 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디자이너가 따라야 할 절대적인 사상이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들겠지만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합니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시크하고 쿨한 마음가짐을 버리고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말을 기업과 정부의 일을 거절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셨다면 당신은 요점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신 겁니다. 제가 당부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디자이너는 각박하고 혼란스러운 디자인 산업의 현실을 맞아 안전한 갤러리에서의 작품활동으로 도망치는 대신, 사회 속의 실질적인 일에 더 많이 부딫히며 끊임없이 본인의 디자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중에는 기업의 광고도 있고 정부의 환경미화 사업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내가 하고 싶은 디자인, 내가 좋다고 믿는 방식을 실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디자이너는 뚜렷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협력자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해져야 합니다. 데이비드 헵워스라는 편집인은 영국의 가디언지에 '디자이너에게 맡기기엔 디자인이 너무 중요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습니다. 그 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디자이너들은 평범한 문제를 교묘한 속임수를 부려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저는 이 글을 읽고 한편으로는 화가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은 디자이너가 내밀 수 있는 카드는 그저 책임을 면하기 위한 아첨과 속임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농담삼아 클라이언트가 얼마나 디자인에 무지한지에 대해 얘기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우리는 디자이너가 클라이언트를 끌고 함께 갈만한 소양이 있는지에 대해 돌아보는 때는 진정 드뭅니다. 디자이너가 확실한 소신을 갖고 클라이언트에게 협조를 구할때 의외로 많은 경우 클라이언트가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항상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관철하고 싶은 소신이 있을 때의 얘깁니다만.
진심으로 몰입할 줄 아는 디자이너는 디자인 외의 모든 문제에 초연합니다. 하고 싶은 디자인이 확실한 디자이너는 지위나 연봉을 신경쓰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의 평가와 수상 실적 따위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디자인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느끼고 삶의 의미를 찾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런 과정을 걷고 있지 않다면, 지금 당장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심각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바가 확실하다고 해서, 뚜렷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거지같은 상황이 디자이너를 덮쳐 모든걸 망쳐버리는 경우가 숱하게 많습니다. 일이 원하는대로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았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바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입니다. 생각을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가다듬으며 일상의 디자인을 수행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믿는 바를 실현할 기회가 옵니다. 주변 사람들이 당신이 생각하는 존재란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런 당신과 함께 일하고 싶다고 느끼기 시작할때 그런 기회는 찾아옵니다. 당신이 기업에 있건, 관공서에 있건, 학교에 있건, 미국에 있건, 네덜란드에 있건 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
국민대학교 제로원 센터 강의에서 최초 발표 (2010. 5. 17.), 홍익대학교 대학원 수업에서 발표 (2010. 5. 19.), 한밭대학교 특강 (2010. 6. 16), <정글 콜론>에 최초 기재 (2010. 6. 10.)
2010.07.04 00:06:57
옳다구나~ 좋을시고! :D
긴 글임에도 행간 속속에 또 더해질 수 있는 의미들이 숨어있음을, 또한 경험과 시간에 의해 이미 살갗에 스며든 후 뱉어진얘기들임을, 읽는 이가 마치 탐구하듯 훝어 내려가며 길을 찾고 자신의 지도와 비교해 보며 읽으면 더욱 얻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아, 항상 느끼는 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의외로 단순명쾌하고 문장의 길이도 짧더군요.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벙긋. :D
긴 글임에도 행간 속속에 또 더해질 수 있는 의미들이 숨어있음을, 또한 경험과 시간에 의해 이미 살갗에 스며든 후 뱉어진얘기들임을, 읽는 이가 마치 탐구하듯 훝어 내려가며 길을 찾고 자신의 지도와 비교해 보며 읽으면 더욱 얻는 게 많을 것 같습니다.
아, 항상 느끼는 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의외로 단순명쾌하고 문장의 길이도 짧더군요. 디자인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벙긋. :D
2010.07.05 00:15:27
아 네 지원님이 즐겨쓰는 표현을 쓴 것입니다. ㅋ
고스톱은 3명이 치는데요. 한번 칠때 보통 5개 피는 가져오기 힘들죠
피가 10장이면 1점 시작입니다. 그리고 피가 하나씩 추가될때에 1점씩 늘어납니다.
10장-1점, 11장-2점, 12장-3점... 이렇게
먼저 3점나면 이기는 거니까 피가 아주 중요하죠.
근데 똥이 피가 유독 많습니다.
한번 내고 한번 뒤집는 것은 아시죠? 같은 그림을 먹을라고 그림에 맞춰 냈는데
뒤집었더니 세상에나.... 같은게 나온거예요. 그러면 싼다고 합니다.
먹지도 못하고 낸걸 뒤집은것과 함께 판에 놓아야 하는거죠.
그러면 기존 판에 있던거, 먹을려고 낸거, 뒤집어서 나온거 세장이 판에 수북히 쌓입니다.
근데 다른 사람이 그걸 가지고 있는 거예요. 나머지 한장을....(같은 그림은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거든요.)
끔찍하죠. 당사자는 물론 쾌재를 부릅니다.
그리고 음흉하게 웃으며 싼 것들을 가져오는 것이죠.
근데 싼 것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이 먹었던 피를 하나씩 가져옵니다.
아주 불합리하죠. 하지만 룰이니 어쩔수 없습니다. (세상일이 다 그렇죠 뭐... 제길)
그렇게 해서 총 5피를 먹게 됩니다. 아..... 죄송
총 6피군요. 똥은 피가 두장, 광이 한장, 쌍피 한장이렇게 구성되어 있거든요.
거기에 다른 사람(2명) 피까지 추가되니 총 6장이군요. 저런 저런 제 실수입니다.
지원님 쓴소리 한번더 사용하셔야겠습니다. ㅋㅋㅋ
제가 잘 설명했나 모르겠네요. 제가 설명을 잘하는 편인데
고스톱 설명은 참 어렵네요. ^^
2010.07.05 12:34:56
아...
쓴소리가 정신에 좋은법.
한동안 생활(?)에 치여 먹고 살기위해 디자인을 했더니
글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_-+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ㅠ_ㅠ
좋은글 감사합니다.
쓴소리가 정신에 좋은법.
한동안 생활(?)에 치여 먹고 살기위해 디자인을 했더니
글을 읽으며 정신이 번쩍-_-+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ㅠ_ㅠ
좋은글 감사합니다.
2010.07.06 16:04:17
질문1 )
디자이너는 디자인 외의 모든 문제에 초연하란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위나 연봉만이 아닌 디자인을 둘러싼 너무 많은 문제는 어쩌란 말씀이신지요.
현실을 무시한 무책임한 도덕적 말씀은 아닌가요?
질문2)
자본과 공공에 관련된 디자인의 잘못된 접근은 동감합니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접근으로 인해 온 산업 디자인의 성장, 공공디자인에 풀린 예산
그것으로 먹고사는 디자이너들과 디자인회사들, 공무원들, 교수님들은 어떻해야 하죠.
이상적인 디자인과 현실의 디자인의 괴리를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또 현재의 디자인 현실에서 정말 돈에서 시크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정말 '좋은 디자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글 내용이 인기가 너무 좋네요. 샘나서 도발 질문합니다. +,+
디자이너는 디자인 외의 모든 문제에 초연하란 의미는 무엇입니까.
지위나 연봉만이 아닌 디자인을 둘러싼 너무 많은 문제는 어쩌란 말씀이신지요.
현실을 무시한 무책임한 도덕적 말씀은 아닌가요?
질문2)
자본과 공공에 관련된 디자인의 잘못된 접근은 동감합니다.
그렇다면 이 잘못된 접근으로 인해 온 산업 디자인의 성장, 공공디자인에 풀린 예산
그것으로 먹고사는 디자이너들과 디자인회사들, 공무원들, 교수님들은 어떻해야 하죠.
이상적인 디자인과 현실의 디자인의 괴리를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지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또 현재의 디자인 현실에서 정말 돈에서 시크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 정말 '좋은 디자인'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글 내용이 인기가 너무 좋네요. 샘나서 도발 질문합니다. +,+
2010.07.07 02:44:43
1) 초연하다는 것은 태도이자 전략입니다. 여러 문제들은 각자 알아서 해결합시다.
2-a)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바른 의견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미운털 박혀 짤리거나,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거나 둘 중 하나로 결판나겠죠. 밥줄 끊길까봐 눈치보고 아둥바둥 한다 싶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2-b) 상황이 그렇게 전개됐습니다. 그것을 순식간에 바꿀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괴리가 생겼다면, 괴리를 안고 살아가며, 그것이 괴리라는 것을 알리고, 괴리가 생기지 않을 방법을 찾아서 증명합시다.
2-c) 경제적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건 중요합니다. 수입만 늘릴 수 있다면 뭐든 한다는 식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2-d) 좋은 디자인은 상황에 따른 상대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그 현실에 부합하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2-a) 모두가 자기 위치에서 바른 의견을 내야 합니다. 그러면 미운털 박혀 짤리거나,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거나 둘 중 하나로 결판나겠죠. 밥줄 끊길까봐 눈치보고 아둥바둥 한다 싶으면 자리에서 물러나야 합니다.
2-b) 상황이 그렇게 전개됐습니다. 그것을 순식간에 바꿀 수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괴리가 생겼다면, 괴리를 안고 살아가며, 그것이 괴리라는 것을 알리고, 괴리가 생기지 않을 방법을 찾아서 증명합시다.
2-c) 경제적 상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건 중요합니다. 수입만 늘릴 수 있다면 뭐든 한다는 식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2-d) 좋은 디자인은 상황에 따른 상대적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현실이든지 그 현실에 부합하는 좋은 디자인을 할 수 있습니다.
2010.07.06 18:43:04
정말 속이 후련한 글이네요. 통쾌하기도 하고 또 뜨끔하기도 한데 꼭 찔려서 더 시원하기도 하고,
반성도 되고요.
그런데 고민 1)
디자인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심같은건 없어도,
디자인이 먹고사는 생계유지수단이 되는건 어찌해야하나요?
그나마 이제껏 해오고 그나마 잘해온게 디자인이라, 디자인으로 먹고 살아야하는건 어찌해야하나요.
디자인을 수단으로 하면 안된다 하였지만,
수단도 되고 목적도 되버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생계유지수단은 다시 따로 마련하고 목적으로서만 디자인을 해야할까요...??
2)
기업에서 일하면서 제가 생각을 정립하게 된 <좋은 디자인>이란,,
바로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인... '티 안나게' 어루만져 주는 디자인으로 거의 모아져가는데,
이렇게 되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는사실 의미가 거의 없어져 버리는 게 되어버리더군요.
그래픽 디자이너는 일단, 짠하고 쿨하고 멋진 이미지를 생산해야하니까.
...여기서도 결국 부던히 ... 노력하는 수밖엔 없는 거겠죠...????
반성도 되고요.
그런데 고민 1)
디자인으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욕심같은건 없어도,
디자인이 먹고사는 생계유지수단이 되는건 어찌해야하나요?
그나마 이제껏 해오고 그나마 잘해온게 디자인이라, 디자인으로 먹고 살아야하는건 어찌해야하나요.
디자인을 수단으로 하면 안된다 하였지만,
수단도 되고 목적도 되버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생계유지수단은 다시 따로 마련하고 목적으로서만 디자인을 해야할까요...??
2)
기업에서 일하면서 제가 생각을 정립하게 된 <좋은 디자인>이란,,
바로 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인... '티 안나게' 어루만져 주는 디자인으로 거의 모아져가는데,
이렇게 되면 그래픽 디자이너로서는사실 의미가 거의 없어져 버리는 게 되어버리더군요.
그래픽 디자이너는 일단, 짠하고 쿨하고 멋진 이미지를 생산해야하니까.
...여기서도 결국 부던히 ... 노력하는 수밖엔 없는 거겠죠...????
2010.07.07 03:07:56
1) 디자인으로 합당한 보수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돈에 초연하자는 말은 돈을 벌지 말자는 뜻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수입을 위해 디자인 하는 것과, 디자인으로 필요한 수입을 얻는 것은 다른 개념입니다. 기본적 생계 유지가 안된다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에 가치를 두느냐겠죠.
2) 이에 대해 잘 설명한 글귀가 있습니다.
"디자이너가 스스로의 방식을 잘 적용한다면 최종 결과물은 마치 아무런 디자인도 하지 않은 듯 보이게 된다. 마치 처음부터 당연히 그런 형태를 띄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새로움'을 쫓는 일에 현혹되지 않고, 자신의 역할을 잘 수행하는데 집중하는 디자이너는 언젠가 시상식장에서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윌리엄 골든, 타입은 읽으라고 있는 것 (Looking Closer 3에서 발췌)
제가 느끼기엔 '티 안나게'게 어루만져 주는게 가장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작업입니다. 자연은 그대로 놓아두면 자연스럽지만, 인공물은 디자이너가 엄청난 노력을 들여야만 비로소 자연을 반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