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학문이라 말할 수 있을까?

‘디자인 학문’이란 표현을 종종 본다. 하지만 왠지 ‘디자인’에 ‘학문’이란 단어를 끼워 넣는 것이 왠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입혀 놓은듯 하다. ‘디자인학’이 도대체 어떤 학문 될 수 있는지 되리어 묻고 싶다.
 
디자인은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표현이고 분야이다. 그리고 같은 표현이지만 분야와 방향은 계속 갈지자 걸음을 하며 진보하고 있다. 예술도 물론 마찬가지이다. ‘예술’ 혹은 ‘디자인’이란 단어는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 이제 문장의 맥락을 알아야 그 안에서 말하는 예술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인 표현이 되었다. 시대에 따라 말하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는 극명하게 나눠지기도 한다. 역사가 장대한 예술분야에서도 미학 혹은 미술사연구는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되어지고 있지만 예술학 같은 학문은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예술학? 이런게 있나? 
디자인은 역사가 생각보다 짧다. 물론 말을 갖다 붙히면 인류가 존재하기 시작한 시점부터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건 좀 비약이라고 생각한다. 디자인은 사실 그 태생이 예술의 진화에 있다. 18세기 중반 윌리엄 모리스라는 선생이 예술을 실생활로 끌어내림으로서 디자인이라는 개념이 도출되었다. 아니 발견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리스 선생은 일종의 사회개혁운동으로서 예술을 실생활로 끌어내렸고 주변 사물들을 예술화 시켜가면서 새로운 예술의 민주화를 시도한 것이다. 공리주의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공예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당시 자본과 산업이 부흥으로 의미 있는 각종 박람회가 개최되고 모리스의 공예를 비롯한 다양한 실생활 예술품들이 선보인다. 이런 현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에서 예술의 규격화에 대한 시도들이 있었다. 예술의 규격화의 필요에 대한 논란 속에서 독일 AEG사의 페터 베렌스는 그 회사 사장아들의 지시로 결국 실제적인 예술의 규격화를 이뤄냈다. 이것은 독일에서 산업합리화의 바람이 강하게 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그리고 전쟁 등 새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혼란스런 사회적 무질서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무질서는 예술의 변화 욕구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즉 이런 다양한 사회적, 예술적 논란 속에서 페터 베렌스의 회사 후배였던 그로피우스가 바이마르 미술공예학교를 인수하여 ‘바우하우스’란 학교를 세우게 되고, 이때부터 규격화된 본격적인 디자인 개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디자인 개념은 다양한 형태로 경제, 사회 전반에 자리 잡게 된다.

예술에서 비롯된 디자인은 자본주의의 첨병 역할을 톡톡히 해냄으로서 인지도가 상당히 올라갔고 현재는 예술과는 뭔가 다른 용어로서 그 위상이 당당하다. 최근 한국 디자이너들 사이에서도 예술과 디자인의 차이점을 두고 논쟁을 버릴 정도니 디자인이 분명 이 사회에서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어떤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분명하다.
기세등등, 의기양양한 현대사회의 디자이너들은 더욱 욕심을 내어 디자인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디자인학’이라는 전공이 생기고 짧은 디자인역사에 온갖 의미를 부여해 뭔가 하나의 줄기를 잡으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예전 정시화 선생님께서 “디자인에 박사 과정?” 물음표를 제기한 적이 있었다. 세계 디자인 흐름에서 디자인을 학문으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여러 의견들이 분분한 상태라고 조심스레 언급하시며 학문의 상징인 ‘박사’라는 과정이 옳은가에 대해 물음표를 다신 것이다. 강의에서는 워낙 중립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분이라 이 의견이 정시화 선생님의 디자인 학문화의 찬반 의견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그때 정시화 선생님은 전문적인 디자인에 대한 연구는 학문으로서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셨던 것 같기도 하다. 학문으로서의 디자인과 학문이 아닌 디자인에 대해 생각해볼 화두를 던지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난 디자인에 ‘학문’이란 어미를 붙힘으로서 많은 제약을 받는 다고 생각한다. 아니 어두건 어미건 디자인에 어떤 단어를 조합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다. 이미 석사과정에서 그린디자인을 공부했지만 결국 나는 ‘디자인’ 그 자체로 돌아왔다. ‘디자인’조차 잘 모르면서 그린디자인이 왠 말인가?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과 디자인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디자인에 관련하여 토론을 해보면 어떨 것 같은가? 토론이 된다. 이렇듯 디자인은 이제 그 전문영역을 넘고 자본을 넘어 문화 그 자체가 되었다. 대중문화, 고급문화 등을 아우르며 디자인은 문화의 모든 영역에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이제는 정치와 사회 등 모든 영역에 손길을 뻗치고 있다. 이미 선진국에서는 그랬고, 한국이 조금 늦게 디자인을 인식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디자인은 정해진 룰이 없다. 또 디자인은 정해진 틀이 없다. 그렇기에 디자인은 어떤 무언가로 정립되지 않는 일종의 유기체이다. 빅터파파넥은 “디자인만을 따로 분리시켜 디자인을 디자인 자체로서만 존재하게 하려는 모든 시도는 삶의 가장 근원적인 모체로서의 디자인의 고유한 가치에 역행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며 디자인을 따로 떼어놓는 시도에 우려는 표했다. 디자인은 디자인 그 자체로만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디자인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곳에도 존재한다. 눈밭에 찍힌 사람의 발자국을 보면 쓰이는 부분과 쓰이지 않는 부분이 따로 있다. 하지만 쓰이는 부분은 쓰이지 않는 부분이 있기에 존재한다. 이렇듯 디자인은 모든 곳에 존재하며 쓰이거나 혹은 쓰임을 유도하거나 보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현대사회에 인간은 온갖 디자인에 둘러쌓여 있다. 우리 삶의 곳곳에 디자인이 있고, 모든 분야에 디자인이 있다. 심지어는 마음과 정신에도 디자인이 있다. 디자인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누구나 말할 수 있다. 아주 자유로운 분야이다. 디자인 의뢰자, 디자인 전문가와 디자인 사용자는 모두 평등하다. 이런 분야가 또 있을까?

디자인 탄생에서 현대사회까지 디자인은 계속 진화되어 왔고 앞으로 그 의미를 더하며 더욱 진화할 것이다. 그렇기에 디자인은 미치도록 매력적이다. 앞의 논리에 빗대면 디자인이 딱히 정해진 학문이 아니었기에 빠른 진보가 가능했고 급속도로 확산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이미 디자이너들의 촉수는 심리, 공학, 역사, 철학, 정치 등 심지어 어떤 분은 애니어그램이라는 특이분야 까지 뻗어가며 이를 디자인에 흡수시키고 있다. 이것은 디자인이 특정한 전문적 학문이 아니기에 가능하다.
혹시, 디자인만의 학문적 분야가 꼭, 반드시 있어야 한다면 사람들이 단순한 미적 취양에 취하거나 유혹당하지 않도록 유도하고 설득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학문으로 정립 되어 너무 커져버린 디자인을 아우르기에는 이미 불가능하다.